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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리의 경험도 유전될 수 있을까? 에피제네틱 메모리의 놀라운 과학

by Milliewise 2025. 4. 26.

우리의 경험도 유전될 수 있을까? 에피제네틱 메모리(후성유전 기억)의 과학

서론: 경험도 대물림될 수 있을까?

아이를 키우다 보면 "이 성격은 나를 닮았네" 혹은 "이 두려움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걸까?"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. 외모나 키처럼 유전되는 것은 당연하다 여겼지만, 혹시 두려움, 습관, 심지어 기억까지 대물림될 수 있을까요? 최근 '에피제네틱스(Epigenetics)'라는 분야의 연구가 이러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.

유전자를 넘어: 기억이 유전될 수 있는가?

전통적으로 우리는 DNA에 저장된 유전 정보만이 세대를 넘어 전달된다고 배워왔습니다. 하지만 최신 연구는, 인생 경험이 DNA 염기서열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도 후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. 이것이 바로 에피제네틱스가 주목받는 이유입니다.

에피제네틱스란 무엇인가?

에피제네틱스는 DNA 서열 자체를 바꾸지 않고도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분자적 메커니즘을 말합니다. 스트레스, 영양 상태, 외상 경험 등 다양한 환경 요인이 세포에 분자적 표식을 남겨 유전자 발현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. 이 변화는 세포 분열을 통해 지속되며, 일부 경우에는 다음 세대로 전달되기도 합니다.

역사적 배경: 라마르크에서 현대 과학까지

19세기 초, 프랑스 생물학자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는 생애 중 획득한 특성이 자손에게 유전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. 그의 이론은 멘델의 유전 법칙이 확립된 이후 오랫동안 배척당했습니다. 하지만 에피제네틱스 연구는 라마르크의 이론을 현대적 맥락에서 다시 조명하게 만들었습니다.

동물 실험: 쥐와 선충의 사례

2014년, 임신 중 영양실조에 노출된 쥐가 출산한 새끼들은 체구가 작고 대사질환 위험이 높았습니다. 더 놀라운 점은, 이 영향이 3세대까지 지속되었다는 사실입니다. 연구진은 이러한 현상이 DNA 서열 변화가 아니라, 정자에 남은 에피제네틱 표식 때문임을 밝혀냈습니다.

또 다른 연구에서는 선충(C. elegans)을 특정 냄새와 굶주림을 연관짓도록 훈련시켰습니다. 놀랍게도, 이 선충의 후손들도 해당 냄새를 피했습니다. 이들은 직접 굶주림을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말입니다. 이는 학습된 기억이 후성유전적으로 전달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.

에피제네틱 메커니즘: 어떻게 기억이 전달되는가?

에피제네틱 변화는 주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발생합니다:

  • DNA 메틸화: DNA에 메틸 그룹이 부착되어 특정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합니다.
  • 히스톤 수정: DNA를 감싸는 히스톤 단백질에 변형이 일어나 DNA 접근성이 달라집니다.
  • 마이크로RNA: 유전자 발현 후 단백질 생성 과정을 조절하는 작은 RNA 분자입니다.

이러한 변화는 DNA 염기서열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세포의 행동과 반응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. 특히 생식세포(정자와 난자)에서 이런 변형이 일어날 경우, 후손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.

학습된 행동도 유전될 수 있을까?

2023년 『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』에 발표된 연구에서는, 선충에게 특정 냄새와 굶주림을 연관짓도록 학습시킨 결과, 이 학습이 후손에게까지 전달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. 놀랍게도, 후손들의 특정 신경세포(AWC OFF)에서 이 기억이 물리적으로 저장되어 있었으며, 해당 뉴런을 조작하면 행동이 달라졌습니다.

이는 단순한 신체적 특성뿐 아니라 학습된 경험까지도 에피제네틱 메커니즘을 통해 전달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.

인간에게도 적용될까?

현재까지 에피제네틱 유전 현상은 주로 동물 실험에서 관찰되었습니다. 하지만 인간에서도 비슷한 가능성이 점점 제기되고 있습니다. 예를 들어, 전쟁, 기근, 심각한 스트레스를 경험한 세대의 후손들이 특정 질환에 더 취약하다는 연구 결과들이 보고되고 있습니다.

다만, 모든 경험이 반드시 유전되는 것은 아닙니다. 생식세포에 안정적으로 에피제네틱 변화가 남아야 하고, 이 변화가 후대까지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.

결론: 유전에 대한 새로운 관점

에피제네틱 메모리는 유전과 환경, 생물학과 심리학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있습니다. 우리는 단순히 DNA 염기서열만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, 인생 경험의 일부도 전달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.

이러한 가능성은 삶의 책임감을 더 깊이 느끼게 합니다. 나의 스트레스, 나의 회복력, 나의 행복이 단순히 나만의 문제가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. 물론, 아직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. 하지만 분명한 것은,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깊은 방식으로 다음 세대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.

"당신의 두려움, 꿈, 스트레스가 당신의 아이들과 손주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?" 과학은 이제 이렇게 답합니다: 어쩌면, 정말 그럴지도 모릅니다.